[역사] 신라통일 이후 만파식적에 담긴 염원과 의미, 신라시대 만파식적은 악기인가?

서론

만파식적은 단순한 전설을 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의 평화와 번영을 염원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신라가 통일 이후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신문왕의 통치 이념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파식적으로 유추되는 피리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1705년에 경주 객사의 담장 아래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옥으로 만든 옥저이다. 이 옥저는 신라의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 및 대금(大笒)의 연원과 관련이 깊은 유물이다. 실제 대나무로 만든 대금처럼 마디가 조각되어 있으며 현재의 대금과 같은 구조이나 길이는 짧은 편이다. 오늘은 만파식적에 얽힌 이야기와 과연 악기인지, 곡의 이름인지, 설화에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역사서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여러 관점에서 살펴볼게요.


만파식적(萬波息笛)이야기의 진실

만파식적이란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불면 세상의 모든 풍파가 가라앉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적(笛)은 피리로 향삼죽(鄕三竹 : 향은 우리나라 악기)라는 뜻이고 삼죽은 대금·중금·소금의 총칭임의 일종이며 중국 당나라 피리와는 다른 신라 고유 악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에 만파식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을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고, 삼국사기에는 그 유래를 믿을 수 없으나 우리나라 고유 악기의 일종으로 보았다.

1705년에 경주 객사의 담장 아래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옥으로 만든 옥저
1705년에 경주 객사의 담장 아래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옥으로 만든 옥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 1206~1289) 스님도 적명(笛名: 피리 이름)이기보다 곡명(曲名: 악곡 이름, 萬波息曲, 만파식곡)을 말함으로 전하는 것을 신비화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 했다. 조선 시대에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종2품 가선대부를 받음)은 이 만파식적 설화에 대해 박숙청이 허탄하고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을 왕이 믿고 따르며 그것을 가져다 피리를 만들고 국보로 정했으니 세상인심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만파식적 설화는 신문왕이 즉위해 왕족인 진골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끝낸 후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김유신을 내세워 정국의 평화를 꾀하려 쓴 계략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689년(신라 신문왕 9년) 신문왕이 신촌(新村)에 들러 잔치를 베풀고 가무(歌舞 : 노래와 춤)를 즐긴 사실은 세력이 이미 약해진 가야 왕족 김유신 세력과 6두품 이하의 세력을 포용하면서 자신의 중앙 집권을 통한 안정된 국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이야기

임오년 5월 초 하룻날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와서 파도가 노는 대로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일관(천문을 맡은 관리)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일관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 보신다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 그 달 이렛날 이견대(사적 제159호, 경주 감포에 있는 유적)로 가서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산 모양은 거북이처럼 생겼고 꼭대기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왕이 배를 타고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띠를 바쳤는데 왕이 같이 앉아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어떤 때는 갈라지고 어떤 때는 맞붙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용이 대답 하였다. 비유로 말씀드린다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는 합쳐야만 소리가 납니다. 폐하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아버님(문무왕)께서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시고 김유신도 천신이 되셨습니다. 두 분 성인이 마음을 합하여 이같이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보물을 만들어 저를 시켜 바치는 것입니다.

만파식적 보관함
만파식적 보관함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게 하였으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다.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개고 바람이 지고 파도가 그쳤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만파식적 설화의 기록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졌다는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가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라는 절을 지었는데, 다음 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 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삭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쳤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 원성대왕조에 기록되어있고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파식적에 담긴 여러 가지 염원과 의미

만파식적은 이름 그대로 '모든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겪었던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의 평화와 안정을 바랐던 염원을 상징합니다. 고대 국가에서 전쟁은 큰 파도와 같았는데, 만파식적을 불어 적병을 물리치고 질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는 왕의 덕치(德治)로써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통치 이념을 보여줍니다. 만파식적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를 넘어, 왕의 신성한 권위를 상징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만파식적은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신문왕에게 준 선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신문왕의 왕권이 단순히 세습된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일한 선대왕과 영웅의 축복을 받은 신성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피리 하나로 모든 재앙을 물리치는 이야기는 곧 왕의 권위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같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효과적인 수단을 상징하며,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만파식적 설화에는 대나무가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진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분열된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삼국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백제와 고구려 유민, 그리고 신라 백성들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이 존재한 현실 상황에서 만파식적은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 모두가 하나로 화합하여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결론

만파식적은 이름 그대로 모든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는 의미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겪었던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시대의 평화와 안정을 바랐던 염원을 상징으로 볼 수 있는데요. 고대 국가에서 전쟁은 혼란과 갈등을 통해 민심의 이반 현상을 가속화 시켜 사회의 불안 요소로 작용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은 만파식적을 불어 적병을 물리치고 질병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왕의 덕치(德治)로써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통치 이념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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