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는 교과서나 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처음 만납니다. 작살 맞은 고래와 사냥에 나선 배, 춤추는 듯한 사람들. 이 익숙한 그림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역동적인 삶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 바위에 새겨진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며, 놀라운 비밀들을 품고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책의 첫 페이지만 읽고 덮어버렸던 것처럼, 우리는 아직 그 진정한 가치를 온전히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 당신이 몰랐을 반구대 암각화와 그 주변 계곡에 얽힌 5가지 놀라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발견과 위협의 역설: 사연댐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의 운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암각화를 세상에 드러낸 것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암각화를 물속에 잠기게 하여 위협하는 것도 바로 사연댐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197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국대학교 조사단은 울산 대곡천 계곡을 찾았지만, 1965년에 이미 완공된 사연댐으로 인해 계곡 하류는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실망한 조사단은 발길을 돌리려 했지만, 한 마을 주민의 안내로 상류로 올라가다 우연히 국보 제147호 '천전리 각석'이라는 또 다른 위대한 바위 그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1970년 12월 24일 조사단이 이곳을 찾았을 땐 1965년 건설된 댐으로 인해 계곡 하류는 이미 수몰된 상태였다. 이에 낙담한 일행이 최경환이란 마을주민의 안내를 받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 천전리 암각화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극적인 발견은 이듬해에 이어집니다. 1971년 12월 25일, 바로 크리스마스에 조사단은 "물속에 잠긴 곳에도 그림이 있다"는 주민의 제보를 듣고 배를 타고 댐으로 변한 계곡 하류를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물이 빠진 틈을 타 잠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바위에서 우리가 아는 국보 제285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합니다.
댐 건설로 수몰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이 암각화는 더 늦게 발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댐 때문에 오늘날 암각화는 매년 수개월간 물에 잠기며 심각한 훼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발견과 위협의 역설은 우리에게 문화유산 보존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2. 이름의 비밀: 진짜 반구대는 어디일까?
우리는 흔히 고래 그림이 있는 암각화를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반구대(盤龜臺)'는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의 바위와 그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아우르는 더 넓은 지명입니다. 이곳은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반고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선비가 찾아와 풍류를 즐기고 시회를 열었던 유서 깊은 문화적 공간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르는 그림의 공식 명칭은 '울주 대곡리 암각화(국보 제285호)'이며, '반구대'라는 명승지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계곡의 이름인 '대곡천(大谷川)' 역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본래 이곳은 '반구천(盤龜川)'으로 불렸습니다.
상류의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과 하류의 대곡리 암각화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적 명칭으로 '반구대'를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처럼 '반구대'라는 단순한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표식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신라의 불교 이상, 조선 선비들의 성리학적 자연관, 그리고 일본 식민 통치의 행정적 상흔이 층층이 쌓여있는 하나의 역사적 파лимп세스트(palimpsest)인 셈입니다.
3. 한 바위에 새겨진 수천 년의 역사: 천전리 각석의 재발견
대곡리 암각화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상류에 위치한 '천전리 각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책과 같습니다. 너비 약 9.5m, 높이 2.7m의 거대한 암면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기록이 겹겹이 쌓여있어 '고대의 방명록'이라 불릴 만합니다. 가장 오래된 층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점 쪼기' 기법으로 새긴 사슴, 호랑이 등의 동물 그림이 남아있습니다.
그 위로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마름모, 동심원 등 기하학적 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윗층에는 신라시대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선명합니다. 화랑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섬세한 그림(세선화)과 함께, 놀랍게도 왕족의 방문 기록이 글자(명문)로 남아있습니다.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까지의 흔적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명문 중에는 서기 525년 신라 법흥왕法興王 동생 갈문왕葛文王이 바위에 글을 새겼다는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기록으로 평가되었다.
기록은 한 편의 드라마 같습니다. 525년, 신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이곳을 방문하여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539년,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내(지소부인)와 장모(보도부인), 그리고 훗날 진흥왕이 되는 일곱 살의 어린 아들 심맥부지가 이곳을 다시 찾아와 애틋한 마음을 글로 새겼습니다. 한 바위가 선사시대의 주술적 염원부터 신라 왕실의 대를 이은 발걸음과 개인적인 슬픔까지, 수천 년의 시간을 오롯이 품고 있는 것입니다.
4. 한 번에 그린 그림이 아니다? 5개의 제작층
대곡리 암각화는 한 명의 천재적인 예술가가 어느 한 시점에 완성한 단일 작품이 아닙니다. 최근의 학술 연구는 이 암각화가 단일한 명작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집단이 덧새겨 만든 살아있는 캔버스, 즉 '5개의 제작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놀라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각 층은 단순히 덧그려진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제와 세계관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역동적인 기록입니다.
가장 오래된 제1층은 가늘고 예리한 선으로 고래사냥을 새긴 어로의 시대를, 제2층은 육지동물을 중심으로 한 수렵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제3층에 이르면 짝을 이룬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동물계의 번식과 같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례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제4층에서는 암각화를 대표하는, 면을 쪼아낸 대규모 고래사냥 장면이 다시 등장하며 어로가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마지막 제5층에서는 몸 안에 새끼를 밴 동물들이 그려집니다.
이는 ‘새끼 밴 동물은 잡지 않는다’는 수렵 사회의 금기, 즉 초기적인 자연보호 관념과 복잡한 세계관의 등장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주제가 어로에서 수렵으로, 다시 어로와 수렵으로 변화하고 표현 기법 역시 선 새김과 면 새김을 오가는 이 5개의 층은, 반구대 암각화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의미가 계속 중첩되고 변화해 온 살아있는 '의례의 장소'였음을 알려줍니다.
5. 선사인부터 조선 선비까지, 모두가 사랑한 성스러운 계곡
마지막으로 시야를 개별 암각화에서 계곡 전체로 넓혀보면, 이곳 대곡천 일원이 단지 유적이 흩어져 있는 장소가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여러 시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특별하고 신성한 '문화 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바위에 고래와 사슴을 새기며 풍요를 기원하는 성스러운 공간(聖所)으로 여겼습니다.
신라시대에는 법흥왕과 진흥왕 등 왕족과 화랑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자신들의 행차를 기록하는 중요한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비들은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중국 주자학의 성지인 '무이구곡'에 빗대어 이상향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17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 이곳에서 시회를 열고 400여 편에 달하는 한시를 남기며 자연과 학문을 논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상향理想鄕으로 삼은 것이나 신라시대 왕족과 화랑들이 이곳을 찾아 명문을 남긴 배경 나아가 선사시대 사람들이 성소聖所로 여겨 바위에 그림을 새긴 행위는 문화경관이란 관점에서 보면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모두는 이 계곡의 독특한 지형과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염원과 이상을 투영했습니다. 이 계곡 자체가 거대한 캔버스이자 역사의 무대였던 셈입니다.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한 자주묻는 질문
Q1 반구대 암각화는 언제, 어디서 발견되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A: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대곡리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절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암각화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냥했던 모습과 관련된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고래, 사슴, 호랑이 등 육지 동물과 함께 고래잡이, 어로 활동 등 해양 생활을 기록한 내용이 특징입니다.
Q2 이 암각화가 가지는 역사적, 학술적 가치는 무엇인가요?
A: 이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 말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 사고방식, 예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특히, 당시 울산 지역이 고래잡이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서, 동북아시아 선사 해양 문화 연구에 핵심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Q3 반구대 암각화는 왜 항상 물에 잠겨 있나요? 현재 보존 문제는 무엇인가요?
A: 암각화는 1965년에 건설된 사연댐의 수위 조절에 따라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물에 잠기게 됩니다. 물에 잠겼다가 노출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암각화 표면이 풍화되고 훼손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보존 과제입니다.
Q4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A: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양한 종류의 고래가 새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혹등고래, 향유고래, 새끼를 업은 고래 등 약 60여 마리의 고래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단순히 고래를 사냥했을 뿐만 아니라 고래의 생태를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했음을 보여줍니다.
Q5 반구대 암각화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나요?
A: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한국 정부와 울산시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최종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으나, 암각화의 보존 문제(수위 조절) 해결이 주요한 선결 과제로 남아 있어 등재 심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결론: 고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
반구대 암각화는 단순히 '고래사냥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댐이 만들어낸 발견의 역설, 이름 속에 숨겨진 여러 시대의 정체성, 한 바위에 새겨진 수천 년의 기록, 오랜 세월 덧그려진 5개의 층, 그리고 선사인부터 조선 선비까지 모두가 사랑한 성스러운 계곡의 이야기까지. 이곳은 수많은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이루는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목소리를 품어온 바위들은 오늘날 차가운 물속에 잠겨 그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이 바위들이 들려주는 깊고 복잡한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을 뿐입니다. 이 고대의 목소리를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답을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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