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수원시 북쪽에 있는 해발 582m의 산이다. 한남 금북 정맥의 주봉으로서 수원을 비롯한, 성남, 용인, 의왕시 등에 산자락이 걸쳐 있다. 최고봉인 시루봉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백운산(564.2m), 남쪽으로는 형제봉 (448m)이 위치하고 있다. 풍수 지리학 상으로 수원의 진산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대동여지도」에도 수원의 진산이 광교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본국산경』에서는 광교산이 광주 서남 오십리에 있고, 수원 동북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옛 수원 읍치를 중심으로 계산한 것이다. 오늘은 광교산에 얽힌 여러 전설과 이야기들을 살펴볼까한다.
광교산에 고려 왕건의 얽힌 이야기
현재 수원시 영역 내에서는 이의동, 상광교동, 하광교동 등에 걸쳐 광교산이 자리하고 있다. 하광교 소류지와 광교저수지를 포함하고 있는 산은 수원권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정지역으로, 지난 1971년 상수도 보호 구역으로 지정 되었으며 약 6개 정도의 등산로가 있다. 이 산의 이름은 광교산, 광악산, 광옥산 등으로 불리어졌는데 고려 야사에 의하면,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의해 광교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 광교산 |
서기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서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1987년 경기도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에는, 아주 먼 옛날 수도를 많이한 도사가 이 산에 머무르면서 제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쳐 서 후세에 빛이 되었다고 해서 광교산이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광교산은 수원 근교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날씨가 좋은날 광교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 멀리 여주·이천, 서쪽으로는 경기만의 서해 5도, 그리고 남쪽으로는 용인·평택·안성, 북으로는 서울의 북한산이 시야에 들어 온다고 한다. 수원의 아름다운 경치 8군데를 모아놓은 수원 팔경 중의 광교적설은, 한겨울 눈에덮힌 광교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 봄 최정상인 시루봉에 내리는 눈과 겨울 동안 쌓인 잔설 역시 손꼽을만한 비경으로 꼽힌다.
광교산은 수원 하천의 근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사계절 내내 흘러내리는 물은 관어동 폭포가 있는 계곡을 타고 동서남북으로 흘러가서, 수원, 용인, 안양, 화성 등의 거의 모든 하천을 이룬다. 동으로는 동막천, 풍덕천을 이루어 흘러가다가 숯내[탄천]에 합류하면서 남한강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미륵골과 일림으로 흘러 만석거, 서호 등에 머물다가 장지천으로 해서 오목천과 합류한다.
광교산과 백제 온조왕 이야기
우성위보, 우성위평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백제왕 온조가 지금의 광주산성 지역인 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사위 우성위와 딸을 보내어 이곳에 살게 하였는데, 우성위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도랑을 만들고 보를 막은것이라고 한다. 온조왕은 딸과 사위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가끔 찾아 왔는데, 이 때문에 온조왕을 위한 행전을 지었으며, 왕이 먹는 우물인 '정자산 고정'도 만들었다고 전한다.
광교산과 최치원 이야기
광교산에는 종대봉과 문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최치원은 광교산 꼭대기에 좋을 매달아 놓은 종루가 있는 곳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곤 하였는데, 이 산봉우리를 종대봉이라 불렀고, 행전 동문 밖에 있던 바위 세곳을 즐겨 찾으며, 그 바위 이름을 문암이라고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광교산에는 창성사를 비롯한 89개의 암자가 고려 시대에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현재 그자취는 찾을 수 없지만, 몇 군데의 절터와 기왓장이 출토되어 불령과 호국의 얼이 어려있는 산이라는 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병자호란과 광교산 이야기
광교산에 전하는 고적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는,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 및 전승비가 있다. 나만갑의 병자록을 보면, “전라병사 김준룡은 빠르고 용감한 군사를 뽑아서 방진을 쳐 사면에서 밖을 향해 공격케 하고 양식은 진 가운데 두는 방법으로, 적과 맞서 싸울 계책을 세웠는데, 그가 광교산에 웅거하자 남한산성과 거리가 30리 정도밖에 안되었다. 적이 날마다 공격해 왔지만, 그때마다 적을 수없이 죽이고 적의 명장도 죽였는데, 그 적장 은 청 태종 한의 매부였다”고 나와 있다. 실제로 김준룡 장군은 호남병마절도사 재위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갖히게 되자, 근왕병을 이끌고 10여일만에 광교산에 이르러 진을 치고, 청군을 맞아 격전을 벌 인 끝에, 청 태종의 사위 양길리치(백양고라라고도 한다)를 포함한 3명의 적장을 사살하고, 기세를 타고 적의 유격 기병대를 격파하여, 적의 목을 벤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김준룡장군 전승비 |
청군은 광교산 계곡 곳곳에 쌓인 동료들의 시체를 태우며 처절한 곡성을 터뜨리기까지 했으니,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호항곡' 이라는 지명이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러한 김준룡 장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자연 암벽에 '충양공 김준룡 전승지'라 음각한 것이 바로 전승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전승비의 각자는 채제공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즉, 정조때 화성 축성에 필요한 석재를 광교산에 구하러 갔던 사람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채제공이 위의 비문과 같이 전승지의 자연 암석에 명각토록 한 것이다.
결론
광교산은 신라 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여겨져 왔으며, 고려 시대에는 89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보물 제9호인 서봉사 현오국사탑비가 있던 서봉사 터와,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머물렀다는 창성사터가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김준룡 장군이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격전지로 이 전투에서 김준룡 장군은 청나라 태종의 사위인 양고리 등을 사살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광교산은 아름다운 경관과 잘 정비된 등산로 덕분에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이자 등산 명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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