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해방 이후 강원도의 역사 유적지에는 무엇이 있을까? 철원 노동당사, 철원 승일교, 화천 인민군 사령부 막사

1945년 광복에서부터 1953년 6·25전쟁 휴전 직후에 만들어진 지정문화재를 중심으로 이 시기에 관련된 문화유산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분류되어 지정·관리되고 있는 등록문화재이다. 이 시기 강원도내에서 만들어져 사용된 등록문화재는 총 14개 소가 지정되어 있다. 노동당사 등 6·25전쟁관련 시설물이 2개소, 교량 등 산업시설물이 2개소, 읍사무소 등 관공서 건물이 3개소, 종교건물인 성당이 7개소이다. 


1.철원 노동당사

철원 노동당사는 철원군 철원읍 금강산로 265에 소재해 있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광복직후 공산치하에 있던 1946년에 지역 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모금에 의해 지어졌다. 주민들에게 성금이란 명목으로 1개 리마다 백미(白米) 200가마씩의 자금과 인력 또는 장비를 동원시켰다. 당시 이곳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북한정권의 관할 아래에 있어서 많은 건축물들이 러시아의 기술적 지원과 러시아가 추구하던 사회적 리얼리즘 건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건물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잘반영하고 있다. 언덕을 이용한 기단의 설정과 대칭적 평면, 비례가 정돈된 입면의 사용으로 공산당사로서의 권위가 느껴진다.

철원노동당사(6.25전쟁직후)
철원노동당사(6.25전쟁직후)


규모는 지상 3층에 건축연면적 1,884㎡이다. 철근 콘크리트와 조적을 병행하여 올린 건물로서 현재는 그 외관만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매우 두터운 슬라브선들이 벽체선 뒤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벽체는 수직방향으로 두텁고 얇은 것이 반복되어 리듬감이 있다. 입구의 1층에는 원기둥 두개를 세워 현관을 두었으며, 상층으로는 점차 작아지는 아치로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비례감과 디테일이 명료한 건축물이다. 전쟁 중 내부 벽체 대부분은 파괴되었으나 외부의 형태가 남아있어 원래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일부 구조체의 철근콘크리트의 사용과 벽식 구조의 혼용, 화강석과 콘크리트·벽돌 및 목재의 혼용은 당시 건축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내부 구조물 작업 시에는 보완을 위하여 열성당원 외에 일반인의 작업동원을 금하였다고 전한다. 1947년 초부터 이 당사에서 중앙당으로부터 지령되는 극비사업과 철원·김화·평강·포천·연천지역 주민들의 동향 사찰은 물론 대남공작을 관장했다.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취조를 당하였다고 한다.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근대건축물이다.


2. 철원 승일교

철원 승일교(承日橋)는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문혜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시차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이다. 규모는 높이 35m, 길이 120m, 폭 8m이다. 원래 이 다리가 놓여 진 곳은 철원읍을 가로지르는 한탄강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예전에는 얕은 여울에 돌다리를 놓아 이용하거나 수위가 높아지면 목선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던 곳이었다. 1948년 8월 군사적 연결도로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에서 먼저 교량 설치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철원 및 김화지역 주민들은 5일간 교대제로 노력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총동원되어 6·25전쟁 초까지 다리의 기초공사와 2개의 교각을 세워 북쪽부분은 거의 완성되고 남쪽부분만 남게 되었다.

철원승일교
철원승일교


다리의 설계는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이었던 김명여 교사가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지역이 수복되어 국군에 의해 임시 목조가교가 놓여졌다가 1958년 12월 미완성된 부분을 남한에서 완공하였다. 러시아식 유럽공법의 철근콘크리트 라멘조 아치교의 형식이다. 아치가 갖는 구조적 이점과 철근콘크리트 라멘조의 방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미관상으로도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2열의 콘크리트 횡방향 기둥은 보를 통해, 종방향 기둥은 아치를 통해 서로 묶여있다. 상 판과 맞닿는 곳에는 살짝 보강을 하여 작은 아치들이 큰 아치 위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큰 아치 위의 상판을 받치고 있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다른 것은 시공자가 바뀌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 다리가 남북분단과 전쟁의 독특한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나, 아치가 갖는 구조적 성능과 철근콘크리트 라멘조의 구조가 조화를 이룬 조형미가 돋보이는 교량이다.


3. 화천 인민군 사령부 막사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소재해 있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1945년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사령부막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1층에 건축연면적 350㎡이다. 단층의 비교적 폭이 넓은 장방형 석조건물에 슬레이트의 박공지붕으로 단순한 형태의 입면과 평면을 가지고 있다. 화강암을 다듬어 쌓아 만든 견고한 벽체에는 다른 막사의 건축물보다 상대적으로 넓은 창문 면적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벽체와 지붕사이의 박공면은 좀더 작은 화강암을 쌓아 아래부분과 구별되며, 작은 통기창을 뚫어 두었다. 벽체의 윗면과 아랫면을 구분하여 돌의 크기를 달리하여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정면과 측면 출입구 위에 아치모습을 한 광창이 있고, 박공면에는 작은 환기창이 있다. 막사시설 대부분은 전쟁 당시 파괴되거나 전후에 새로 시설을 하여 옛 시설이 거의 없어졌다. 전쟁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된 이 막사를 통해 당시 인민군의 생활상과 군사시설의 상황을 알 수 있다.

화천 인민군사령부막사
화천 인민군사령부막사


4.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춘천시 약사고개길 23에 소재해 있다.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1920년 춘성군 동내면 곰실공소가 풍수원성당에서 분할되어 성당으로 승격된 이후 1928년 5월 시내 약사리 고개 현 죽림동성당의 아래 터(성 골롬반의원)로 옮겨와 목조 함석집을 지어 춘천 본당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49년 미군의 도움을 얻어 새 성당이 착공되었다.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한 화교 기술자와 또 다른 한 사람의 기술자가 맡아 시공하였다고 한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석재를 먼 거리에서 옮겨왔음에도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었다. 내부 공사에 들어갈 즈음 6·25전쟁이 발발했다. 1.4 후퇴 이후 유엔군의 반격 중 공습으로 인해 짓고 있던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등 부속 건물이 파괴되었다.

주교좌 성당
주교좌 성당


1951년 8월에 제1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공 토마스 신부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성청(聖廳)의 지원으로 1953년에는 건물공사를 대부분 완료하였으며, 1956년 6월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主敎座)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규모는 1층에 건축연면적 489.27㎡이다. 초창기 강원도에 벽돌로 축조된 횡성 풍수원성당이나 원주 용소막성당과는 달리 석조로 마감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고딕형의 건축 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지역성을 띤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다는 평가이다. 주출입구와 장미창, 종탑으로 이루어진 중앙 중심의 대칭으로 서향한 평면과 입면은 비교적 단순하며 한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명쾌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게 하였다. 장미창도 단순한 디자인이며 문과 함께 머릿돌을 사용하여 디자인의 통일성을 구하고 있다.

돌출된 트란셉트(transept)에 해당하는 부분은 성구실(聖具室)과 복사 대기실로 독립된 공간이며, 측면으로 고해실(告解室)이 돌출되어 있다. 일정 간격으로 반복된 버트리스(buttress)와 견고하고 방호적인 외관은 로마네스크의 느낌도 지니고 있다. 입면에 반영된 네이브(nave)와 아일(aisle)의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장방형의 단순한 평면에 둥근 아치형 목조천정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클리어스토리(clear story)가 없는 대신 지붕창을 두었다. 종탑 위십자가는 명동성당의 십자가를 재현하였고, 주 출입구의 문에는 오랫동안 이곳에 헌신한‘골롬반외방선교회’의 업적을 기려 아일랜드 풍 십자문양 한 쌍이 꾸며져 있다.

내부는 장방형의 단순한 평면에 제대 뒤로 방사형의 창을 두어 초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기둥 없이 장스팬의 무주(無柱)공간으로 통합되어 있다. 스테인글라스와 창호는 완만한 곡선의 목조천장을 하고 있다. 한편, 성당 옆 2층의 벽돌로 되어있던 사제관은 1998년 공사로 헐리고 노출콘크리트로 된 새로운 사제관이 지어졌다. 현재의 성당은 1998년 4월부터 9월 14일까지 5개월에 걸쳐 개·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내부의 마감은 대부분 바뀌었으나 외관은 보존되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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