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은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위치한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역사적 명소로 유명하죠. 또한 공주시에 위치한 공산성은 웅진백제시기(475~538년)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 문주왕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옮긴 475년에 축조된 왕성입니다. 총 길이 2,660m, 토성과 석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다양한 역사 유적 건축물이 성 내에 있습니다. 오늘은 공주를 대표하는 백제유적지 중 하나인 공산성을 살펴볼게요. 그리고 공주 공산성을 여행하는 관람정보도 소개합니다.
1. 공산성은 어떤곳인가?
비단결 금강이 감싸 흐르는 고풍스러운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1500년전 고대왕국 대백제의 찬란한 향취가 묻어있는 공산성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인해 문주왕 원년(475년)에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죠.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습니다.
| 공산성 전경 |
이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습니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성입니다. 성의 길이는 총 2,600m(토성 735m, 석성 1,925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 터가 확인되었습니다.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습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감염을 비롯해 중군영 등 중요한 군사시설이었으며 현재 성내에는 추정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임류각지, 연지와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 그리고 조선시대 유적인 쌍수정, 영은사, 쌍수정 사적비, 만하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2011년 10월에는 백제의 옻칠가죽찰갑옷을 비롯해 마갑과 화살촉, 철제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갑옷에 645년 이라는 글씨가 남아있어, 갑옷의 제작 및 사용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공산성 성곽길 따라 걷기, 수문병 교대식, 고마열차 타기
공산성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금강을 낀 공주시를 한눈에 볼 수 가 있어 트래킹을 하기에도 최적의 장소입니다.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천히 걷는것도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또한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는 11시, 13시, 14시, 15시, 16시 (하루 5회) 공산성 금서루 일원에서 수문병 근무교대식, 백제의상 체험등 다양한 볼거리도 있습니다. 고마열차는 3월에서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일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운행하는 열차로, 어른기준 3000원의 요금을 내면 공산성에서 송산리고분군, 공주한옥마을, 국립공주박물관 경로를 탑승하여 구경할 수 있습니다. 매표소는 공산성앞 입구에 있습니다.
| 공산성 둘레길 걷기 시간 |
3. 공산성에 얽힌 이야기, 인조와 쌍수정 이야기
이곳 공산성 쌍수정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1624년 인조임금이 왕위에 오른 직후 이괄이란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인조는 왕이 된지 1년도 못되어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난을 오게되었습니다 이조는 공산성의 큰 나무 두 그루에 기대어 시름을 달레곤 했는데요. 얼마 후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놓은 인조는 그동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리고 금대를 걸어주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훗날 이곳에 지은 정자가 바로 쌍수정입니다. 쌍수정은 봄에 벚꽃 필 때 더욱 아름답게 거닐 수 있는 명소입니다.
| 공산성 쌍수정 |
4. 공산성 내 유적지 살펴보기
추정왕궁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되며 1985~1986년 총 2년에 걸친 발굴 조사 때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 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문화재자료 제49로 지정된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주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머물렀던 곳으로 쌍수에 기대어 왕도를 걱정하던 인조가 평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통훈대부의 영을 내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쌍수정 사적비는 도지정유형문화제 제35호로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던 5박 6일간(인조 2년 2월 18일~23일)의 내용을 새긴 비문으로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으로 글씨는 숙종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썼다고 합니다.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 22년(500)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 건물은 1980년 산성에서 발굴조사된 추정임류각지의 구조를 근거로 1993년에 새로 복원한 곳입니다.
| 공산성 임류각 |
공산성 성문인 영동루,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동문인 영동루는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밑부분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서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공산지의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 공산성 영동루 |
서문인 금서루는 4곳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유지만이 남아있었는데 이후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도에 복원되었다. 공산지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합니다.
| 공산성 서문 금서루 |
남문인 진남루는 문화재자료 제48호로 공산성의 남문이며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건립한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산남의 관문이었습니다.
| 공산성 진남루 |
북문인 공북루는 도지정 유형문화제 제37호로 지정되어있으며 공산성의 북문으로 선조 36년(1603)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좋은 예이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 사이를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이었습니다.
| 공산성 공북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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