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 정읍의 늦봄은 어떤 모습일까. 아득한 옛날, 힘없고 가난한 우리 농민들은 부조리에 맞서 이 땅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니, 갑오동학농민혁명이다. 만석보와 황토현에서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깃발을 들었다. 세월은 흘러 21세기, 아직도 그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농민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정읍은 이런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크게 승리를 거둔 곳으로 이 일대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비롯해 전봉준 장군의 동상과 사당,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다. 피땀으로 똘똘 뭉쳐 싸웠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농민혁명의 꿈과 한, 이상이 배어있는 곳이다. 전적지 건너편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063-530-7578)은 동학혁명의 시대적 배경과 전개과정 등을 전시물과 첨단 영상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는 1894년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곳. 전시관엔 유물 기증과 구입 등을 통해 확보한 1,400여 점의 동학 관련 유물과 자료가 전시돼 있고, 1층에는 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는 추념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교육관에서는 학생과 일반인들의 신청을 받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가르친다.
| 황토현 전적지 |
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는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다. 주산마을에 모인 농민들은 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 내용을 종이에 서명하는데, 필체의 모양이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사발통문이라 했다. 서명(이름)을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적지 않고, 둥그런 사발을 엎어놓고 그 원을 따라 이름을 적었는데, 이는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란다.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역사의 한 갈피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일부가 떨어져나가 그 세세한 건 알 도리가 없지만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농민들의 참뜻이 합쳐진 계획된 운동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모의탑은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들이 거사 계획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여기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의 생몰 연대와 그 후손들의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모의탑 인근 고부초등학교 안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관아 터가 있다. 고부관아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실상을 알려주는 곳으로, 고부봉기 때 농민군에 의해 점령됐던 곳이다. 운동장 한켠에 이곳이 역사적 현장이었음을 말해주는 초석과 기단석이 남아 있다.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해 관아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이곳에 학교를 세웠다. 고부관아터가 있는 고부면에서 황토현 고개를 넘어 이평면으로 간다.
황토현은 옛 백제인들이 정읍에서 부안으로 넘나들던 고개이자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과 싸워 승전한 곳이다.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기치로 내걸고 불같이 일어선 동학군은 이곳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다. 황토현은 이렇게 아픈 사연이 스민 고개지만 추풍령이나 한계령처럼 높지 않아 자동차로 10분이면 해발 3백미터 정도의 봉긋 솟은 구릉을 넘을 수 있다. 해서 우리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고개를 아무런 생각 없이 훅 지나친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이 참으로 싱그럽다. 이평면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를 바라본다. 이 들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는 김제 만경평야로 이어져 그 세를 과시한다.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듯 아득함과 경이로움이 마음을 넉넉하게 감싼다. 평야 안쪽에는 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 있다. 고택은 㥓자형으로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잔디가 깔린 마당 한쪽에 변소와 헛간으로 쓰는 아래채가 따로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이다. 이 초가집은 전봉준이 고부농민 봉기를 일으키기 5~6년 전에 와서 살던 곳이다. 그 후 일부가 불타버렸으나 보수하여 사적으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전봉준 고택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장내리 조소마을 솔숲에는 전봉준 선생의 제단과 유해가 없는 허묘가 있다. 전봉준은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지만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천안 전씨 문중에서 제단(㰐⚂)과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허묘 옆에는‘전봉준장군운명시비’도세웠다.
2. 동학농민운동의 촉발 도화선이 된 만석보
1892년 5월, 고부군수 조병갑은 보세를 거둬들이기 위해 기존에 쓰던 예동보를 두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또 다른 보를 만들었다. 착취에 가까운 보세(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는 농민들의 원성을 샀고, 일부 격분한 농민들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 만석보를 때려 부수고 배들평으로 몰려가니(1894년 1월 10일 밤) 동학농민혁명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보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만석보유지비와 비문만이 배들평야를 내려다보며 외롭게 서 있다. 만석보에서 가까운 곳에는 정읍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고팔던 말목장터가 있다. 그 당시 전봉준을 위시해 수많은 농민들이 집결해 봉기를 논의하던 곳이다.
| 정읍 만석보 |
3.내장산의 고장 정읍
정읍 하면 내장산, 내장산 하면 정읍이 떠오른다. 봄기운이 물씬한 내장산은 온통 연녹색이다. 내장산은 들머리부터 녹음으로 뒤덮여 있다. 녹음 바다는 천년고찰 내장사까지 이어진다. 일찍이 내장산은 지리, 천관, 월출, 능가산과 더불어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혀왔다. 내장사 일주문에서 출발해 백련암, 서래봉, 불출봉, 원적암으로 이어지는 산행 코스는 연중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특히 내장사 스님들이 108 그루(염주알 숫자의 각종 단풍나무를 심어놓은 단풍나무길(내장사 일주문에서 극락교까지 길게 이어진 길)은 단풍철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아름답다. 일주문에서 산길을 오르면 옛 내장사터였던 벽련암에 이른다. 산행에 자신이 없다면 내장산을 횡단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연자봉,장군봉까지 올라보는 것도 좋다.
4. 백제 정읍사의 고장
정읍시내에는 백제 때의 가요인‘정읍사’를 주제로 꾸며놓은 정읍사 공원이 있다. 정읍사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백제가요로서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됐다. 공원 한쪽에 남편을 기다리는 백제 여인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망부상과 노래비가 서 있다. 정읍에서도 칠보면은 이른바 태산선비문화권에 속한다. 안동이 양반문화였다면 이곳은 벼슬보다는 의리와 학문에 뜻을 둔 선비문화로 자리매김해왔다. 이곳에는 신라 말 유학자인 최치원의 위폐를 모신 무성서원을 비롯해 호남 제일의 정자로 꼽히는 피향정(䊼䎓㭱, 보물 289호), 99칸 집으로 불리며 조선 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는 김동수 가옥, 동진강의 생태와 물놀이장∙인공폭포∙분수대∙수생식물원∙야생화관찰원 등을 갖춘 물테마전시관과 물테마유원지 등 볼거리가 많다.
| 정읍사 |
옥정호(섬진강)를 끼고 있는 산내면은 정읍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옥정호는 임실과 정읍에 걸쳐 있는 섬진강 최상류의 맑은 호수로 운암호, 섬진호, 산내호 등으로도 불린다. 옥정호는 대부분 임실군에 속해 있으며 이곳 산내면은 섬진강댐을 사이에 두고 임실땅과 맞닿아 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에 찾으면 옥정호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섬진댐에서 임실로 가는 30번 국도는 산과 호수를 굽이굽이 에둘러 돌아간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노라면 마치 신선이 된 듯 가슴이 탁 트인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에 여행의 묘미가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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