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매년 내는 자동차세,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요? 매년 수백만 명의 운전자가 자동차세 고지서를 받고 무심코 세금을 납부합니다. 하지만 이 당연해 보이는 세금 납부 뒤에는 심각하게 왜곡되고 낡은 시스템이 숨어있습니다. 2,800만 원짜리 국산 세단 소유주가 6,300만 원이 넘는 수입 고급차와 똑같은 세금을 내는 시스템 말입니다. 이것은 법의 허점이 아니라, 바로 법 그 자체입니다.
이 법은 30년 전 기준에 머물러 우리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자동차세의 근간인 '배기량' 중심 체계는 1991년에 마지막으로 개편된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엔진 다운사이징이 기술의 표준이 되고 전기차가 도로를 채우는 시대에, 이 낡은 기준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요? 이 글에서는 우리가 잘 몰랐던 자동차세의 불합리한 진실 세 가지를 파헤치고, 우리의 세금 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1. 6천만원 수입차가 2천만원 국산차와 세금이 같다? 배기량의 함정
현재 자동차세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조세 역진성'입니다. 즉, 더 비싼 차를 소유한 사람이 오히려 더 적은 세금을 낼 수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문제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6,330만 원에 달하는 한 수입차(1,995cc)와 2,788만 원짜리 국산 중형차(1,999cc)는 배기량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연간 약 40만 원의 거의 동일한 세금을 냅니다.
차량 가격은 두 배 이상 차이 나지만 세금 부담은 같은 셈입니다. 심지어 5,199만 원짜리 최신 전기차는 고작 10만 원의 정액세만 부과되어 이들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세금 부과 기준이 차량의 '가격'이 아닌 '배기량'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자동차 기술은 엔진 크기를 줄이면서도 성능을 유지하는 '다운사이징'이 대세입니다.
이로 인해 고가의 차량이 오히려 배기량은 낮아져 재산 가치에 비해 현저히 낮은 세금을 내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 역시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고가의 외산차가 가격에 비해 배기량이 낮은 경우 일반 국산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세부담을 진다는 의견 이는 자동차세를 재산세의 성격으로 볼 때, 조세 형평성에 심각하게 어긋나는 명백한 문제입니다.
2. 친환경 전기차의 역설: 녹색 번호판의 세금 사각지대
문제의 핵심은 우리나라 자동차세가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첫째는 차량 소유 자체에 부과되는 ‘소유분 자동차세’이고, 둘째는 연료 소비에 따라 부과되는 ‘주행분 자동차세’입니다. 전기차는 이 두 가지 과세 체계를 모두 교묘히 비껴가면서 새로운 형평성 논란을 낳고 있습니다. 전기차는 엔진 배기량이 없다는 이유로 소유분 자동차세는 연 10만 원 정액만 부과받고, 휘발유나 경유를 쓰지 않으니 주행분 자동차세는 단 한 푼도 내지 않습니다.
문제는 전기차의 부상이 이미 삐걱거리는 세수 시스템에 더 큰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전체 자동차세수는 고유가 대책에 따른 유류세 인하의 영향으로 2021년 8조 4,000억 원을 정점으로 이미 감소세로 돌아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 부담이 거의 없는 전기차의 폭발적인 증가는 미래 세수 기반을 뒤흔드는 심각한 위협입니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전체 승용차 중 친환경차(전기, 수소, 하이브리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3.4%(60만 대)에서 2024년 10.4%(275만 대)로 불과 5년 만에 3배 가까이 급증했습니다. 정부 시나리오에 따르면 2050년에는 자동차세수가 현재의 69% 수준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자동차세는 도로 유지보수, 교통 혼잡 유발 등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분담하는 성격도 가집니다. 하지만 전기차는 도로를 똑같이 이용하면서도 이러한 비용 부담에서 사실상 면제되어 있어 내연기관차 소유주와의 심각한 형평성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3. 왜 제도는 멈춰 섰나: '한미 FTA'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
앞서 살펴본 문제들만 보더라도 자동차세 개편은 시급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불합리한 제도는 수십 년째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걸까요? 여기에는 예상치 못한 강력한 걸림돌이 존재합니다.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입니다. 2011년 발효된 한미 FTA 협정문에는 "대한민국은 차종간 세율의 차이를 확대하기 위하여 차량 배기량 기준에 기초한 새로운 조세를 택하거나 기존의 조세를 수정할 수 없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한국이 자동차세의 기준을 배기량에서 차량 가격이나 CO2 배출량 같은 새로운 기준으로 바꾸려면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FTA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조항은 과거 미국산 대배기량 자동차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통상 협상의 산물이었지만, 이제는 도리어 우리의 세제를 합리적으로 현대화하려는 시도의 발목을 잡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2023년 정부가 자동차세 개편을 추진하려 했으나, 바로 이 FTA 개정 문제 등에 부딪혀 현재까지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무리
미래를 향한 질주, 세금 제도는 언제까지 과거에 머물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현행 자동차세 제도가 가진 세 가지 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1. 배기량 기준의 모순: 고가 차량이 더 적은 세금을 내는 조세 역진성.
2. 전기차의 역설: 세수 감소와 형평성 문제를 동시에 야기하는 세금 사각지대.
3. 개편의 걸림돌: 개혁의 발목을 잡는 한미 FTA라는 예상 밖의 장애물.
물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전기차에 '추가등록비'를 부과하거나 실제 주행 거리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주행거래세'를 도입하며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습니다. 자동차 기술은 내연기관을 넘어 전기와 수소로, 자율주행으로 미래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세금 제도는 언제까지 30년 전 과거의 기준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 공정하고 합리적인 조세 제도를 위한 사회적 논의와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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